이름부터 쿰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29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의 회담 기록이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조선(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내용이다. 그 뒤 9월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시아의 만주와 조선 철수 및 사할린 남부 일본 할양)과 11월17일 을사늑약이 잇따라 체결됐다.
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관한 가장 건조한 기술이다. 내막은 간단하지 않다. ‘밀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정식 조약이나 협정이 아닌 탓이다. 문건은 1924년 미국의 역사가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발견’됐다. 심지어 ‘비밀’이라 단정하기도 모호하다. 일본의 <고쿠민신문>이 이미 1905년 10월 관련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보도가 나오자 미국 정부가 펄쩍 뛰었다. 자신들의 필리핀 지배권이 확고해 일본과 ‘비밀 거래’가 필요하지 않다는 취지였다. 이에 일본 정부도 ‘우리가 지시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것에 근거하지 않은 보도’라며 미국 정부에 공식 해명까지 했다. 그러나 고쿠민신문이 친정부 매체였던 점 등을 생각하면, 보도의 출처는 일본 정부일 가능성이 짙다.
일본 정부가 일부러 흘릴 만한 동기는 충분했다. 보도 당시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한푼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열리는 등 일본 국민의 반발이 거셌다. 미국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든든하게 약속했다고 알려지면 민심을 다독일 수 있을 터였다.
밀약의 성격을 두고도 논쟁이 있었다. 태프트 장관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보에는 ‘합의된 대화 각서’라고 표기돼 있다. 이를 ‘협정’으로 볼 거냐 ‘대화록’으로 볼 거냐가 쟁점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맞든, 이 회담이 포츠머스 조약, 을사늑약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명확함이 쿰쿰함에 에워싸여 있을 뿐이다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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