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중요한 안전망으로 기능해왔다. 높은 출산율과 적극적인 교육투자로 재생산을 담당했고, 노인 돌봄과 환자 간병을 도맡았으며, 친척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경우 소득과 재산을 나눴다. 26일 발표된 자료들은 이러했던 ‘가족 안전망’이 무너져내리며 구성원들이 ‘각자도생’으로 떠밀리는 현실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어려워도 손 내밀 곳은 마땅치 않다. 갤럽월드폴 조사 결과를 보면,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나 친지가 있는지’ 문항에서 한국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18.9%나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사회적 고립도가 4번째로 높은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꼴찌에서 7번째인 국민 행복수준, 지난해 기준 10만명당 26.0명인 자살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경제적 약자들의 취약성은 더 심각하다. ‘2022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를 보면 저소득층은 다른 소득계층보다 2배 이상 우울감을 느끼며, 지난 한 해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경우는 3배 수준이었다. 가구원의 질병은 가족 내 갈등을 초래하는 문제 1순위로 꼽혔다. 저소득층은 만성질환을 앓는 경우가 다른 소득계층의 약 2배인 반면, 질병·상해에 대비할 민간의료보험 가입률은 낮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가족의 전통적 기능으로 간주돼오던 돌봄도, 재생산도 멈춰가고 있다. 한국복지패널 조사에서 ‘부모 부양이 자녀 책임인가’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경우가 소득수준과 관계없이 절반에 달했다. 가족 대신 사회가 부양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는 인식은 보편화했지만, OECD 최고 수준인 노인빈곤은 여전하다. 양극화 속에 끊어져가는 계층 이동 사다리는 저출산 요인으로 지목된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연구를 보면, 조사에 응한 20~30대 여성 중 절반은 결혼·출산이 중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다만 자녀의 계층 상승 가능성이 있다면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과 출산이 계급화한다는 방증이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 공동체를 복원하고, 공적 보호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그러려면 소득재분배로 양극화를 완화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확대해 청년층에게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복지정책을 강화해 가족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함은 물론이다. 극소수만 사람다운 삶을 누리고, 대다수는 각자도생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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