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전공 교수
종교와 관련된 범죄나 스캔들은 탐사저널리즘의 이상적인 소재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낯설고 기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폐쇄적인 집단, 그 내부에서 자행되는 학대나 폭력 같은 자극적인 소재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일으킨 열풍은 이례적이다. 이 새로운 매체는 고도의 전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중파 방송 심의규정에서 자유로우며, 대상 교단들의 법적 대응이나 물리적인 반발을 돌파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그러나 자극적인 개별 사례에 집중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종교는 어떻게 반사회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가? 그리고 왜 그런 종교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의심하는 대신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며 도리어 외부 사회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가?
우선 몇가지 오용되는 개념들을 정리해보자.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진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아가동산, 만민중앙교회 등은 흔히 ‘이단’, ‘사이비’ 등으로 불린다. 이들 단어는 <논어>나 <맹자> 같은 유교 경전에도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런 고전적 표현을 활용한 근대 번역어다. 이 맥락에서 이단(heresy)이란 특정한 종교 전통에서 정통 교리를 따르지 않는 분파를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인 종교 환경에서 이 말은 교단 내부에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공적인 용어로서는 부적절하다.
한편 사이비종교란 식민지 시기 법률용어인 유사종교(類似宗敎)의 통속적 변형이다. 그것은 공인된 종교가 아닌, “종교 비슷하지만 아닌” 단체들을 멸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종교를 제도적으로 규정하는 체제라면 모를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다. 해당 종교인들이 법적 처벌이나 사회적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종교가 아닌 것을 종교인 척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종교를 이용해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전통적인 주류 교단 대신 수상하고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종교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냐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신자들의 결핍이나 교단의 세뇌를 원인으로 지목하는 설명이 많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교육 수준이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비교적 높은 신자들의 존재나, 그들이 상당 부분 자발적으로 ‘세뇌’를 받아들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종교경험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종교운동은 이론이나 관행에 호소하기보다는 강렬하고 신비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험의 특징은 개체적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신성이나 우주, 공동체 성원들과 강렬한 일체감을 느끼는 데 있다. 이것은 심오한 진리에 대한 직관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의 감정이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감소 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일상적인 감각이나 상식, 언어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주기 때문에 세속화, 합리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종교가 지속되는 근거가 된다.
물론 그런 체험에 대한 수요는 기존 종교들에서도 충족될 수 있다. 그러나 기성 종교 제도의 전통적인 교리와 의례에 진부함을 느끼다가, 낯선 집단에서 강렬한 신비체험과 친근한 공동체를 처음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종교경험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어떤 믿음과 실천의 체계와도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는 극단적인 선행도, 극단적인 악행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신성함에 대한 감각이 카리스마적인 개인에 대한 숭배와 연결된다면 인간은 그 사람에게서 신을 보게 된다. 강제 노역이나 성적인 착취까지도 초월성에 대한 헌신과 구분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종교를 이용하는 범죄자들은 그런 상징조작의 달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이단으로 지정하거나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선의의 피해자를 줄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 진리에 대한 사악한 세력의 박해로 허위 표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를 이용한 착취나 폭력은 기성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지도자의 카리스마나 신앙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빈약한 조건에서 흔한 현상이다. 해로운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비판받지 않는 종교 권력이다.
<출처 : 한겨레>
#사설
#신문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시사
#칼럼
[칼럼] 한국과 일본은 ‘담대한 중견국 연대’에 나서라 (0) | 2023.04.05 |
---|---|
[칼럼] 아빠의 육아 참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0) | 2023.04.05 |
[홍은전 칼럼]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0) | 2023.04.03 |
칼럼 [말글살이]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0) | 2023.04.03 |
[칼럼] 한-일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0) | 2023.04.0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