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꾸는 것은 원칙적으로 무효라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나왔다. 근로기준법 94조는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경우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 판례는 1978년부터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과반수 동의를 받지 않은 취업규칙도 효력을 인정해왔다. 45년 만에 법 취지에 맞게 판례가 바로잡힌 셈이다.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것은 2004년 주5일제 도입 이후 과장급 이상 간부사원에게 월차휴가를 폐지하고 연차휴가 일수에 상한선을 둔 현대자동차의 취업규칙이다. 대법원은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면서 근로자의 동의를 받지 못한 경우, 이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해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을 침해한 것으로 원칙적으로 무효”라며 “노동조합이나 근로자들이 동의권을 남용하였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당 취업규칙 변경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효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이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근로조건을 결정해야 한다는 헌법과 근로기준법의 노사대등 원칙을 되살린 것이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라는 애매한 기준을 악용해 사용자 쪽이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개정할 여지를 없앴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재계에서는 동의 요건 완화를 꾸준히 주장해왔고, 박근혜 정부 시절 이를 반영한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을 시행했다가 노동계 반발을 산 끝에 문재인 정부에서 폐기된 바 있다.
현 정부 들어서도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부가 꾸린 전문가협의체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근로시간이나 임금체계 개편 때 전체 노동자가 아닌 특정 직무·직종·직군의 동의만 받아도 되는 제도를 권고했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과반수 노조’나 ‘노동자의 과반수’ 요건을 완화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개정된 취업규칙이 적용되는 직군인 간부사원의 과반수 동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과반수 노조의 동의를 받지 않은 만큼 불이익 변경은 무효라고 못박았다.
법이 정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사용자의 이익만 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 정부의 노동정책도 시대를 역행할 수는 없다. 법의 원칙에 입각해 공정한 노사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번 판결의 취지를 정부와 재계는 되새겨야 할 것이다.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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